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왜 자퇴했을까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 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하레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중 어떤 한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 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 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죠.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by Joe & Soohy 2006. 2. 25. 00:21
[마이데일리 = 도쿄 이태문 특파원] 정우성 손예진 주연의 '내 머리속의 지우개'(이재한 감독, 싸이더스 제작)가 일본 네티즌이 뽑은 2005년 최고의 영화 베스트 6위의 성적을 거뒀다.

일본의 권위있는 엔터테인먼트 각종 순위 집계사인 오리콘이 인터넷을 통해 10대~40대 이상의 세대별 남녀 세대별 남녀 15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11일 순위를 발표했다.

그 결과 한국영화로는 유일하게 '내 머리속의 지우개'가 '2005년 베스트 영화 랭킹' 톱10에 들었는데, 남녀별 랭킹에서 남성은 11위, 여성은 6위로 여성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두드러졌다.

오리콘측은 지난해 10월 22일 개봉된 '내 머리속의 지우개'에 대해 아직도 롱런 히트를 달리고 있으며,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첫주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는가 하면 한국영화 흥행수입의 기록도 갈아치웠다고 설명했다.

또한, 흥행성공의 원인으로 "한류 붐을 넘은 궁극의 러브스토리로 많은 여성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게 특징"이라며, "한국 영화계의 젊은 기수로 톱을 달리는 카리스마 배우 정우성과 영화 '외출'에서도 주연을 맡은 순애영화의 새로운 여왕 손예진의 명연기가 전 일본을 감동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번 오리콘이 발표한 베스트 영화의 1위 자리에는 조니 뎁 주연의 '찰리와 쵸콜릿 공장'이 올랐으며, 동명의 만화 원작을 스크린으로 옮긴 '나나'가 그 뒤를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이밖에도 3위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4위는 '스타워즈 에피소드3:시스의 복수'가, 그리고 5위에는 일본영화 '전차남'(電車男)이 올랐다.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의 경우, 지난해 일본의 영화전문 사이트 ‘에이가닷컴’(eiga.com)이 발표한 외국영화 흥행 톱10에서도 흥행성적 30억엔으로 8위에 드는 등 영화 '외출'과 함께 2005년도 최대의 한류 화제작으로 부상했다.

한편, 오는 3월 10일에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 DVD와 비디오가 정식으로 출시될 예정이라 다시 한번 감동을 맛보려는 영화팬들의 관심이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by Joe & Soohy 2006. 2. 20. 10:08

drawball.com의 태극기



뉴스에서 접하고 직접 들어가봤다.
저 태극기는 1명이 그린것이 아니라 몇백명이서 힘을 합쳐 그린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뜻을 모아 장소와 그림 도안을 미리 구상, 공유해서 저런 멋진 그림을 만들었다고 한다.
옆에 작은 그림들이 주위로 수없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저것이 1인당 그릴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어디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대단하다라는 생각이 든다.
by Joe & Soohy 2006. 2. 10. 11:13
SK Telecom.. 좋은 기업이지. 하지만 말이지. 기업의 수익은 모든 기업의 실질적인 Goal이지만, 기업윤리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건 기업가로써 문제가 큰 것이다.
필요할때만 고객이고, 필요없을때 나몰라라 한다면 그건 아래 나오는 붉은 악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011-010을 쓰다가 문제가 생기면 고객의 의견은 나몰라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일 뿐이다.
안그래도 50%가 넘는 고객을 유치하며 독과점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렇게 경영을 하는 것은 기업가로써 지탄받아 마땅하다.
진짜 큰 사람이 되려면 작은 것 부터 소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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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악마 게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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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악마 "SKT, 월드컵 때만 축구사랑"

[오마이뉴스 2006-01-31 14:49]

[오마이뉴스 이승훈 기자]

▲ 붉은악마가 홈페이지에 올린 SK텔레콤의 월드컵 마케팅을 비판하는 글.


축구국가대표팀 후원단체인 '붉은악마'가 평소에는 축구발전에 무관심하다가 월드컵 때만 되면 축구를 지원하는 척하는 일부 국내 기업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나섰다.

기업들이 축구를 이용해 막대한 마케팅 효과를 내고도 월드컵이 끝나기가 무섭게 축구에 대한 지원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쳤는가 하면 다시 월드컵 시즌이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축구발전을 위하는 듯한 이미지 만들기에만 혈안이 돼 있다는 점도 꼬집었다.

붉은악마의 타깃이 된 기업은 국내 최대 이동통신 회사인 SK텔레콤. 이 회사는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붉은악마의 후원사로서 함께 거리응원을 주도하는 등 끈끈한 관계를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6년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축구열기가 고조되고 있는 연초 붉은악마는 SK텔레콤의 '생색내기용' 축구마케팅에 날선 각을 세우며 반발하고 있다.

붉은악마는 지난 24일 홈페이지(www.reddevil.or.kr)에 'SK텔레콤의 월드컵 마케팅을 바라보며'라는 글을 대의원회 명의로 올렸다.

"월드컵 때만 나타나는 거대기업들 문제 있다“

이 글에서 붉은악마는 "월드컵 때만 나타나는 거대기업이 마케팅을 벌여 브랜드 인지도 등 혜택을 거둬가는 것은 기업 윤리상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다"며 "이 때문에 수십년 동안 묵묵히 축구에 투자한 기업들이 축구 축제기간인 월드컵에 오히려 소외되는 현상이 안타깝다"고 꼬집었다.

붉은악마가 SK텔레콤을 작심하고 비판하고 나선 것은 약속했던 월드컵이 끝나자 축구발전 지원 약속을 외면했다는 게 이유다.

붉은악마는 "SK텔레콤이 2002년 당시 붉은악마를 활용해 국제축구연맹(FIFA) 후원사 이상의 마케팅 효과를 거둔 후 우리의 요청에 따라 유소년축구 지원 등 '축구'에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약속을 수차례 했지만 지키지 않았다"며 "그동안 수차례 전화를 통해 축구에 대한 관심을 주문했지만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말이 돌아왔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랬으면서도 "4년 만인 지난해 말 SK텔레콤 관계자는 '제휴를 논의하자'며 붉은악마 대의원회에 전화를 했다"며 "2002년 월드컵 기간 동안 국민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렇게 4년 동안 철저하게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유감을 표했다.

붉은악마는 또 SK텔레콤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부천SK 프로축구단 매각 움직임으로 한국 축구계에 찬물을 끼얹은 SK그룹의 행태도 축구발전과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또 "한국에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하게 축구팀이나 관련 단체를 후원한 기업들도 적지 않은데 다만 (이들은) 대형 모델을 섭외하고 많은 광고를 할 경제적인 여력이 없을 뿐 한결같은 마인드는 SK텔레콤 이상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붉은악마는 이들이 축구 마케팅의 진정한 승자라고 말하고 싶다"고 밝혔다.

"진정한 마케팅 승리자는 꾸준한 후원자들"



▲ 지난해 11월 12일 저녁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스웨덴의 친선경기에서 붉은악마 응원단이 종이가루를 날리며 환호하고 있다.

ⓒ2005 오마이뉴스 권우성

끝으로 붉은악마는 SK텔레콤에 한국축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면서 "최근 SK텔레콤이 광고 등을 통해 붉은악마와 함께 하는 듯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으나 현재 붉은악마와 SK텔레콤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로 글을 맺었다.

이밖에도 붉은악마 회원들의 SK텔레콤에 대한 반감은 홈페이지 곳곳에서 묻어났다. 현재 자유게시판에는 SK텔레콤을 성토하는 글들이 여럿 올라와 있다.

최근 SK텔레콤이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세계적인 응원문화를 SK텔레콤이 창출했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송민우씨는 "어이가 없다. 이런 식으로 한국축구와 붉은악마를 교묘히 이용하는 것 정말 싫다"며 "평소에 먼 발치에서 K리그 등 각종축구를 위해 묵묵히 도와주시는 기업과 너무나도 비교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SK텔레콤은 그동안 축구 발전에 지원을 하지 못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중장기적인 지원방안을 마련 중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SK텔레콤 관계자는 "2002년 당시 붉은악마 측과의 약속은 회사차원의 공식적인 약속이 아니라 실무진에서 구두로 이루진 것이고 당시 실무자들이 교체돼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며 "월드컵이 끝난 이후 국가대표 후원을 계획했지만 다른 업체가 이미 공식 후원사가 돼 있어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일회성의 축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장기적인 축구 지원방안을 현재 마련 중"이라고 덧붙였다.

SK텔레콤 “2002년 약속 공식적인 차원 아니었다”

SK텔레콤은 최근 축구국가대표이자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있는 박지성, 이영표 선수를 월드컵 캠페인 모델로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라는 슬로건의 월드컵 광고를 진행 중이다.

또 2002년 서울 시청 앞 광장과 광화문 거리응원의 모습을 담은 사진속 주인공을 찾아 경품을 주는 '2002 대한민국 그날의 주인공 찾기' 행사를 진행하는 등 월드컵과 붉은악마를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다.

기업들이 스포츠를 통해 회사의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등 마케팅 활동을 벌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행위다. 특히 전세계적으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축구를 통해, 그것도 축구의 가장 큰 축제인 월드컵은 기업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홍보의 경연장임에 틀림없다.

2002년 엄청난 월드컵의 홍보 효과를 실감한 국내 기업들은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다양한 마케팅 방안을 마련하느라 고심해 온 것도 사실이다.

월드컵 때만 축구사랑 '탈날라'

통신업체 중 KTF는 재빠르게 축구협회와 붉은악마와 후원 계약을 맺었고 SK텔레콤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박지성과 이영표 선수, 가수 윤도현씨를 모델로 기용하는 등 기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돈 안되는(?) 축구를 외면하다가 홍보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월드컵 기간에만 국가대표를 응원하고 축구에 과도한(?) 관심을 내보이는 것은 묵묵히 축구발전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은 여타 기업들이 보기에 씁쓸한 부분이 없지 않다.

실제로는 월드컵의 홍보효과에만 관심을 두면서도 겉으로 보기에만 축구 발전에 기여하는 듯한 이미지로 순순한 축구팬들의 열정을 이용하는 것은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by Joe & Soohy 2006. 2. 2. 00:48

백남준님 ㅠ.ㅠ



(뉴욕=연합뉴스) 이래운 특파원 =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가 29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숨졌다. 향년 74세.

백씨는 이날 저녁 8시께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아파트에서 부인 시게코 쿠보다씨 및 간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고 가족들이 전했다.

백씨의 조카인 켄 하쿠다씨는 이날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백씨 별세 사실을 전하고 "장례식은 수일후 뉴욕 맨해튼 메디슨 애비뉴의 프랭크 켐벨 장례식장에서 거행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하쿠다씨는 백씨의 사인에 대해 `자연적 원인(natural causes)'이라고 말했다.
지난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난 백씨는 일본 도쿄대학의 미학문학부와 독일 뮌헨의 루드비히막시밀리안대학교에서 공부한뒤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예술활동을 벌였다.

1960년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발표할 당시 그는 무대 아래로 뛰어내려가 넥타이를 자르는 등 관객에 대한 행위를 무대 밖으로까지 넓히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1963년 독일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데 이어 1969년 미국에서 샬롯데 무어맨과 공연을 하면서 비디오 아트를 예술 장르로 편입시킨 선구자라는 평을 듣기 시작했다.

이어 1984년에는 파리와 뉴욕을 통신위성으로 연결하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기획, 지휘하기도 했다.

백씨는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마비됐음에도 불구, 독일 비디오조각전(1997), 바젤국제아트페어(스위스 바젤, 1997), 98서울판화미술제(예술의전당 미술관, 1998), 40년 회고전(미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박물관, 2000) 등 왕성한 활동을 계속했다.

이런 활동의 결과 1996년 10월 독일`포쿠스'지가 선정한 '올해의 100대 예술가' 중에 들었고, 1997년 8월에는 독일 경제월간지 `카피탈'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 가운데 8위에 오르기도 했다.

현대예술과 비디오를 접목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98년도 교토상', 한국과 독일의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괴테메달'을 받았고, 2000년엔 금관문화훈장도 받았다.

lrw@yna.co.kr

(끝)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by Joe & Soohy 2006. 1. 30. 17:57

네트워크의 세계



인터넷은 거미줄처럼 생겼다. 상상만 했던 인터넷 공간을 실제 그림으로 그려보니 거미가 어디선가 툭 튀어나올 것만 같다. 신기하다.

배럿 라이언(Barrett Lyon)이라는 젊은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인터넷 공간을 시각화해 눈길을 끌고 있다. 정기적으로 인터넷 지도를 그려내는 그는 사실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만 처음으로 냈을 뿐,실제로는 많은 동료들의 도움을 얻어 지도를 만들고 있다.

인터넷 지도를 작성하는 데에는 트레이스라우팅(tracerouting) 기술이 이용되고 있다. 트레이스라우팅 기술이란 네트워크로 뭉쳐진 PC들이 어떻게,얼마나 연결돼 있는지 그 형태를 알아내는 방법.이 기법을 이용하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네트워크로 연결된 PC간 물리적 거리도 산정할 수 있다.

배럿은 “처음엔 그냥 심심풀이 삼아 해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프로젝트가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인터넷 지도를 이용하면 어디에서 큰 일이 터지는지 금세 알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예를 들면 이라크 전쟁이 터지기 전날에는 그쪽 지역의 인터넷 지도가 극심한 혼돈의 양상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진행 상황을 마치 현실을 보는 것처럼 인터넷 지도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는 것.

그의 인터넷 지도는 또 각 대륙별 네트워크의 소통을 각각 다른 색깔로 구분하는가하면 .net이나 .com,.kr,.org 등의 1단계 도메인을 나누어 보여주기도 한다.

웅장하고 휘황찬란하지만 혼돈의 극치를 보여주는 인터넷 지도는 옵트 프로젝트(www.opte.org)를 방문하면 감상할 수 있다. 혼돈 속 질서를 감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인터넷은 우주의 한 모습과 닮아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by Joe & Soohy 2006. 1. 10. 21:07
결국 이렇게 되는군.
by Joe & Soohy 2006. 1. 10. 13:06
가락고가 잘못한거야 아님 기자가 잘못 쓴거야?
가락고 졸업생으로써 참 보기가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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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가락고등학교 게시물 -
서울시교육청 주관 학교혁신 우수실천 사례 발표 대회에서 가락고 "좋은 학교 가꾸기 3e운동"이 최우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우리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 학부모님들이 모두 힘을 합하여 가락고를 좋은 학교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좋은학교 가꾸기 3e운동에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을 보여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학교혁신은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우리학교의 혁신사례 연수 자료는 홈페이지 상단 "교육행정소식"의 "3e운동"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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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기자―강준구] 이상한 ‘교육혁신’ 사례

수업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부족한 점을 찾아내고 학생들에게 직접 강의를 평가받은 21명의 중학교 교사들,기존 성적표 대신에 학생 스스로 수업태도와 목표를 기록한 36쪽짜리 소책자 성적표를 만든 초등학교,전교생을 상대로 특기적성교육을 실시한 중학교,지렁이와 쌀뜨물을 이용한 친환경 교육프로그램….

지난 25일 서울시교육청 주관으로 열린 ‘학교혁신 우수실천사례 발표대회’ 본선에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생생한 현장 경험이 담긴 교육혁신 사례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최우수 혁신상은 이들 대신 3억5000만원의 거금을 들여 학교시설을 일부 리모델링한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돌아갔다.

이 학교의 리모델링 비용 중 2억5000만원은 시교육청과 구청,동창회 등 외부로부터 협찬받은 것이었다. 이 ‘최우수 혁신’ 고교의 핵심 사업은 급식실,교무실,보건실 등의 리모델링. 이 가운데 교사들의 공간인 교무실의 리모델링 비용은 2654만원으로 45개 교실에 대한 리모델링비 674만원의 4배가 넘었다. 거기에다 이 학교는 500만원을 들여 교사용 골프연습장까지 교내에 만들었다.

재정형편이 어려워 아이디어와 추진력만으로 학교수업을 ‘혁신’하려던 다른 학교들은 이 고교에 밀려 예선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학부모,교사,학생이 수차례 토론을 거쳐 교육환경 개선 노력을 기울였다지만 과연 수억원을 들여 건물 리모델링을 한 학교가 최우수 교육혁신 사례로 꼽혀야 했을까.

행사를 주관한 교육청 담당자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심사위원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겠지만 예상 외의 결과라 당황스럽다”고 했다. 교육청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거액의 지원금을 받은 만큼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이 고교를 본선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시 교육위원,초·중·고교 교장,학부모 대표 1명 등 모두 9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은 “개별 심사위원의 채점표는 공개할 수 없다”면서 심사결과 공개를 완강히 거절했다. 심사위원단은 “공정하게 평가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학생들의 창의력과 학습욕구를 더욱 발전시키려는 교사들의 피땀어린 ‘소프트웨어’ 개선 노력이 아니라 학교시설을 바꾸고 교사들의 골프연습장이나 짓는 ‘하드웨어’ 공사에서 교육혁신을 찾을 수 있는 것인지 심사위원단에 묻고 싶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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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 & Soohy 2006. 1. 6. 14:59
‘사회 정의감 不在’ 중국사회 충격

[조선일보 여시동 기자]

시내버스 안이었다. 엄마는 힘 좋게 생긴 중년 여인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중년 여인은 버스 안내원이었다. 그는 엄마를 향해 차비 2위안(약 250원)을 더 내라고 윽박질렀다. 마오마오(毛毛·14·사진)는 엄마 아빠와 함께 방금 버스에 올랐는데, 경로우대 대상인 아빠(74세)를 제외하고 엄마(58)와 자신 몫으로 각각 1위안씩 모두 2위안어치의 차표를 막 산 뒤였다.

엄마가 “훠커우에서 탔으니 한 사람당 1위안씩이 맞지 않느냐”고 항변했으나 안내원은 신제커우에서 탔으니 1위안씩을 더 내야 한다고 우겼다. 엄마는 억센 여인과의 말다툼에 승산이 없어 보이자 “좋아요, 그래 봐야 2위안인데, 내고 말지. 하지만 우리가 억울한 건 분명해요.”라며 표를 더 샀다.

여중생 마오마오는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방금 신제커우에서 훠커우까지 걸어가며 옷가지와 책 몇 권을 산 뒤 버스를 탔는데 신제커우에서 버스를 탔다니…. 마오마오는 목소리를 낮춰 엄마에게 속삭였다. “무슨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정말 말 같지 않아.”

귀가 밝은 안내원은 이 말을 듣자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한 손으로 마오마오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한 손으로 목을 눌렀다. 마오마오는 안내원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엄마는 울음 섞인 비명만 지를 뿐 여인을 당해내지 못했고, 명문 칭화(淸華)대 교수 출신인 아빠는 그저 힘없는 노인에 불과했다. 엄마 아빠는 안내원에게 목을 짓눌린 딸의 안색과 입술이 점점 하얗게 변해가는 것을 두 눈을 뻔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기절한 마오마오는 버스 밖으로 던져지듯 밀려났다.

명랑했던 칭화대 부속중 2학년생 마오마오의 삶은 여기까지였다. 급히 인근 얼파오 군병원으로 실려갔으나 숨은 이미 멎어 있었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지난 10월 4일 오후 3시쯤 베이징(北京)의 726번 시내버스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사건은 해당 버스회사가 언론의 사건 취재를 조직적으로 저지하는 바람에 즉각 보도되지도 못했다. 안내양 주위친(朱玉琴)은 사건 직후 경찰에 체포됐다.

마오마오가 숨져갈 때 승객들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는 ‘남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중국인 전통의 ‘사오관셴스(少關閑事)’ 의식이 극명하게 표출된 사례다. 홍콩 시사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은 최근호에서 이 사건을 재조명하며 중국인들의 보신주의와 정의감 부재를 강하게 비판했다. 저우샤오정(周孝正) 중국인민대학 교수는 “사회 정의감 부재가 늘 문제가 돼왔지만 이번 사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개탄했다.

(여시동기자 [ sdye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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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영화도 아니고 이럴수가 있을까?
중국이라는 나라...아무리 '사오관셴스'라고 해도 목숨의 소중함에 대해서까지도 그래야만 하나.
믿을것은 결국 가족이나 친한 사람들 뿐이라는 말인데, 이 얼마나 삭막한 삶인가.
대학 재학시절 학문적으로 비슷한 이론을 들은적이 있다. 명칭은 기억이 안나지만, 뉴욕의 한 골목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것을 주변 아파트에 있는 사람들이 살인자가 도망가고나서 까지도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진술인 즉, 나 아닌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를 했을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도 정말 삭막하구나 싶었는데, 이건 바로 옆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다른 사람들이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러고 있다는 것은 정말 충격적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사건에 관련되있던 모든 사람들. 그들이 정말 사람일까?

네이버 뉴스에서 퍼옴. 원문 조선일보.
by Joe & Soohy 2005. 12. 2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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